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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언어, 문화(History, Language, culture)/역사 잡학

[지명 유래] 이태원(梨泰院) 유래 및 어원 - 임진왜란

by 카레유 2015. 11. 4.

이태원

 

- 서울특별시 용산구 동북쪽 지역으로 남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이태원은 외국의 여러 문화들을 접할 수 있는 곳인데요.

이는 예전에도 마찬가지였다고 합니다.

 

 

과거의 이태원은 과연 어떤 곳이었을가요? 

 

 

이태원 지명의 유래

조선시대 초기부터 이 지역에 이태원이라는 역원(驛院)이 있었다는데서 유래합니다.

현재는 없어지고, 용산고등학교 앞에 이태원 역원 터만 남아있습니다.(고려시대부터 여관이 많았던 지역)

*역원 : 조선시대 사신, 관리들이 머물며 말을 공급받았던 공영 숙소

 

(용산고등학교 정문에 있는 '이태원 터')

* 위의 비석에 '서울 근교의 네 숙소'란 동쪽의 보제원(普濟院) / 관원(箭串院), 서쪽의 홍제원(弘濟院), 남쪽의 이태원(梨泰院)을 말한다.

 

 

근데 왜 "이태원"이라고 이름 지어진 걸까요?

 

 

세가지 설이 있습니다만, 

관련 자료를 분석해보면 아래와 같은 순서가 됩니다.

 

 

1.조선시대 초기(1400년대)

조선시대 초기, 이태원의 표기는 泰院입니다.

조선시대 왕들의 성씨인 '오얏나무 리(李)'를 쓰고 있습니다.

왕의 성씨를 사용했거나, 혹은 이태원 부근에 오얏나무가 많았던건 아닌지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출처 : 성현(成俔) - 용재총화> 

 

(오얏나무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참고로 오얏나무는 자두나무를 말합니다.

 

 

2. 조선시대 중기(1500년대)

그러던 것이 임진왜란 즈음 하여

'다를 이(異)', '아이밸 태(胎)' 자를 써서 이태원(異胎院)이라고 표기하기도 합니다.

<출처 : 이유원(李裕元) - 임하필기(林下筆記), 한국민속문학사전-설화편>

 

벌써부터 슬픈 느낌이 들지만...관련 내용은 아래에서 소개하겠습니다.

 

 

3.조선시대 효종 이후(1600년대 이후)

그러다가 조선시대 효종 때, 이 곳에 배나무가 많다고 하여,

'배나무 이(梨)'를 써서 이태원(泰院) 이라고 표기하고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 용산구 및 이태원동에서는 위의 설을 '이태원동의 유래'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배나무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오얏나무, 배나무는 그렇다 치겠는데...

 

 

어째서 임진왜란 즈음하여 '다른(異) 아이를 배었다(胎)'는 의미의 이태원(異胎院)이 된 걸까요?

 

 

 

/* 때는 바야흐로 조선시대, 1500년대 후반 즈음... */

 

- 일본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과 명나라로 시선을 돌린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 : "조선아~ 내가 명나라를 좀 접수하려고 하는데, 길을 비키렴~안 비키면 너네도 깐다~"

 

 

 

선조 : "몬소리야~ 너네가 명나라를 어케 까~ 헛소리 그만해~"

 

 

(정말 별 대비를 안함...)

 

 

도요토미 히데요시 : "어쭈! 나 분명 경고했다! 너네 끝까지 말 안듣지?"

 
 
선조 : "아 몰라~ 시끄러워~"
 

 

1592년 4월 13일...

 

 

도요토미 히데요시 : "난 분명 비키라 했는데, 너네가 안 비킨거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기요사마! 너네는 선봉으로 나아가 조선을 접수하라!"

 

 

고니시 유키나가 : "충성! 알겠스므니다!"

 

 

가토 기요마사 : "내가 가면 조선은 이미 정복된거나 다름 없스므니다!"

 

 

!!! 임진왜란 발발 !!!

 

 

1592년 4월 14일, 부산 함락!

 

 

(그리고 약 20일 만에...)

 

 

1592년 5월 3일, 한양(서울)도 함락!

 

 

가토 기요마사 : "한양도 접수했으니, 우리 부대는 일단 이태원에 주둔한다! 모두 짐을 풀도록!"

 

 

왜병들 : "알겠스므니다!"

 

 

 

(근데 근처 이태원 황학골에 여승(비구니)들이 거주하는 '운종사(雲鐘寺)' 라는 절이 보임)

 

 

 

가토 기요마사 : "흠흠! 한바탕 몸좀 풀었더니... 힘이 넘치는구나"

 

 

왜병들 : "저흰 힘든데요..."

 

 

가토 기요마사 : "이 것들이 말끼를 못알아 듣네... 지금 가토 대장군님께서 힘이 넘치신다고!!! 힘을 좀 쓰고 싶다고!!!"

 

 

왜병들 : "아!!!??? 알겠스므니다"

 

 

 

('가토 기요마사'와 왜병들은 운종사의 비구니들과 미처 피난가지 못한 여인들을 겁탈하게 된다...)

 

 

 

가토 기요마사 : "몸도 풀었으니, 이제 이 곳을 떠난다! 저 절간은 불태워버리도록!"

 

 

왜병들 : "가토 장군께선 불교신자가 아니시므니까? 구지 태우실 필요까진..."

 

 

가토 기요마사 : "아 쫌!!! 걍 태우라고~!!"

*운종사는 물론 불국사를 태운 것도 가토 기요마사로, 불교신자라서 불 태우는 것도 좋아했던듯...(한양 궁궐을 태운 정황도 있음)

 

 

 

 

과연 이때 조선의 왕이었던 선조는 무얼 하고 있었을까요?

 

 

 

 

선조 : "어라! 진짜 쳐들어왔네!! 내가 잡히면 안되니께! 어서 도망가자!!!"

 

 

 

(이 때쯤엔 이미 의주로 피난 가심. 요동으로 넘어가려고 했으나 명나라가 오지 말라고 해서 못감...)

 

 

 

 

 

(근데 일본의 전법이라는게... 최단 시간내에 우두머리를 잡아 항복을 받아내는 방식)

 

 

 

(그래서 왕잡으러 한양까지 갔는데 왕이 없음?!!!)

 

 

- 즉, 급하게 올라가느라 후방이 비어있게 되어 전략에 차질이 생긴 상태!!!

 

 

(이틈을 타, 선조 아들이었던 광해군이 의병을 지휘 하고, 바다에서 이순신이 활약하면서...)

 

 

 

광해군 : 모두 나를 따라 왜군을 격퇴하라!!!

 

 

이순신 : "조선의 바다는 내가 지킨다!!!"

 

 

(왜군은 결국 조명연합군(조선+명나라)에 의해 격퇴된다)

 

 

(전쟁이 끝나자...선조도 한양으로 다시 돌아온다)

 

 

- 그런데 임진왜란 당시 겁탈당하여 아이를 낳은 여성들의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함 - 

 

 

신하들 : "왜군들이 임신시킨 여성들이 아이를 낳았는데... 참으로 가엽습니다..."

 

 

선조 : "낳아서 키우면 되잖아"

 

 

신하들 : "근데 왜나라 놈들의 피가 섞였다고 하여..."

 

 

선조 : "그럼 추방 시켜야하나?"

 

 

신하들 : "그래도 가엾은 우리 백성들인데... 궁휼히 여기셔서 조치하심이...."

 

 

선조 : "그럼 이태원 쪽에 보육원 같은 것좀 만들어주고, 알아서 키우라 해"

 

 

 

그리하여, '다른(異)' '아이를 밴(胎)' 여성들은 이태원에 모여 살게 되며,

 

여기서 이태원(異胎院)이라는 이름이 기원하였다는 설이 있습니다.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는 어떻게 되었냐고요?

 

'노량해전'에서 '이순신'한테 개털리고 일본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가토 기요마사'가 울산에 축조한 '서성포왜성'은 지금도 일본인들의 관광지로 유명합니다.

 

    

 

 

이태원 유래에 관해 다른 설 들도 있어 소개해 드립니다.

 

 

또 다른 설 1.

임진왜란 때, 왜나라 사람들이 이 곳에 많이 모여 살게 되면서

외국인을 '다를 이(異)', '다를 타(他)' 자를 써서, 이타인(異他人), 혹은 이태인(人)이 불렀다는 데서 유래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출처 :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

 

또 다른 설 2.

선조는 임진왜란 때 겁탈당한 여인들을 위해 이태원에 거처를 마련해주었고,

'임신한 여자의 주택'이라 하여 '잉태원(孕胎院)'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면서 이태원이 되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틀린 설

정묘호란(1627) / 병자호란(1636)으로 인에 청나라(후금)에 끌려갔다 고향(鄕)으로 돌아온(還) 여인(女)들인

환향녀(還鄕女)들이 거주하면서 생겼다는 말은 틀린 것입니다.(기록상으로는 임진왜란 때부터가 맞습니다) 

*환향녀들이 나은 자식들을 오랑캐(胡) 포로() 자식(息)이라하여 호로자식()이라는 말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관련 포스팅 새창열기)

 

 

 

이태원은 이후 현재까지도 외국과 관련된 지역으로 유명합니다.

 

1. 임오군란(1882) 당시에는 청나라 부대의 주둔지가 됩니다.

*임오군란은 1882년 임오년에 신식군대인 '별기군'에게만 맛있는거 주고 좋은 옷을 주자, 구식군대가 열받아서 일으킨 폭동. 청나라가 와서 진압...

 

2. 한일협약/경술국치(1910) 당시에는 일본군 조선사령부가 세워집니다.

*한일협약/경술국치는 1910년 경술년에 일제가 대한제국의 국권을 불법적으로 피탈하여 식민지로 전락하게된 사건

 

3. 한국전쟁(1950) 당시에는 미군기지가 정착하게 됩니다.

* 광복/한국전쟁 시기에 해외 및 북에서 남으로 넘어온 피난민들이 집단 거주하던 '해방촌'이 형성되었던 곳이기도 함

* 미군의 외박/외출이 허용되면서 기지촌이 형성되기도 했음.

 

4. 1960년대 외국 공관이 이태원/한남동 일대를 중심으로 자리잡기 시작합니다.

*외교관들이 근무하는 기관을 재외공관 또는 공관이라고 하며, 공관에는 대사관, 대표부, 총영사관, 공사관 등이 있습니다.

 

5. 1970년대 미121후송병원이 이주하면서 상인들도 함께 이주, 현재 모습의 쇼핑거리가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6. 1980년대 86아시안게임, 88올림픽을 계기로 더욱더 외국에 알려지기 시작합니다.

 

7, 1990년대 관광특구로 지정됩니다(1997)

 

 

지금은 모... 

이태원 하면 백형/흑형부터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을 볼 수 있는 곳이 되었지요

 

요즘 핫플레이스로 유명한 이태원에 가시면,

가끔은 이런 슬픈 역사가 있었음을 기억해보시는 것도 좋겠네요^^

 

감사합니다.

 

 

 

 

#참고

 

1751 - 한성부 남부 둔지방 리태원계
1894 - 한성부 남서 둔지방 리태원계 리태원동
1914 -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리태원리
1936  - 경기도 리태원정 

1946 (1946. 10. 9)  -  서울특별자유시 리태원동 

해방 후 동제실시에 따라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행정동명을 "이태원 남부동 --> 이태원 1동" / "이태원 중부동 + 북부동 --> 이태원 2동" 으로 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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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dogumaster.com/map/subway

전국 지하철 역명 유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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