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언어, 문화(History, Language, culture)/역사 잡학

[지명 유래] 충정로(忠正路) 유래 및 어원 - 을사조약

by 카레유 2015. 10. 31.

충정로(忠正路)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아현삼거리에서 서대문역 까지의 길

 

 

 

 

충정로는

예전에 제가 다니넌 회사 부근이라

몇년 동안 매일 지나다니던 길이기도 한데요...

(맛집도 많이 알고 있는데... 나중에 기회가 되면 포스팅 해보겠습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아파트가 있는 동네이기도 하지요

 

(충정아파트 - 1937년 일제에 의해 지어진 최초의 아파트로 알려져있음)

 

그런데...

 

'충정로'의 '충정' 또한 실존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충정공(忠正公)'으로 알려진 순국지사 '민영환' 선생이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민영환 선생 - 고려대 박물관)

 

우리나라 최초로 세계일주를 한 사람으로도 알려져 있는데요(관련 포스팅 - 새창 열기 클릭)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고, 그의 묘비에는 이승만 전대통령이 친필까지 있다고 합니다.

 

대한제국 애국가를 작사하기도 했던 민영환 선생이 충정로의 주인공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현재 우리가 부르는 애국가는 아닙니다. 관련 내용은 포스팅 하단 참고)

 

 

 

한번 그 내막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 때는 바야흐로  대한제국 초창기 즈음이 되겠습니다.*/

(대한제국은 1897년 조선말기, 고종황제가 만든 나라로...1910년 일제에 의해 없어지게 됩니다...)

 

 

민영환은 과거시험에 장원 급제 후

 

주요 고위관직을 거치며 고종황제에게도 신임을 받아 '태극장' 훈장까지 수여 받게 됩니다.

 

또한 독립협회를 후원하고, 

 

친일 세력(이완용 및 일진회 등)과 격렬히 싸우며 

 

우리나라를 호시탐탐 노리는 일본을 견제하려는 노력을 합니다.

 

하지만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기를 잡으면서, 친일 세력은 민영환을 강등시켜 한직으로 좌천시켜 버립니다.

 

 

그리고...

 

 

# 1905년 11월 9일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직후, 이토 히로부미가 서울에 온다...)

 

 

이토 히로부미 : "성가신 러시아 놈들도 밟아줬으니... 이제 조선을 먹어야겠군."

 

 

이토 히로부미 : "조센징들아! 너네 왕인 고종한테 가서 전해라! 이토 히로부미가 왔으니 친히 알현하라고!"

 

 

 

# 1905년 11월 10일

(다음날,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을 알현한다.)

 

 

 

 

고종 황제 : "그대는 무슨 염치로 나를 찾아왔는고!!!"

 

 

이토 히로부미 : "일왕 천황 폐하께서 이 문서를 전달하라셔서 왔지요"

 

 

일왕(메이지 천황) : “짐이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대사를 특파하니, 대사의 지휘를 일종하여 조치하소서.”

 

 

(즉, 대한제국을 이토 히로부미에게 넘기라는 의미와 다를 바 없는 내용)

 

 

고종 황제 : "지금 일본이 우리나라에서 자행하고 있는 만행을 내 두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는데...지금 무슨 소릴 하는겐가?!!!"

 

 

이토 히로부미 : "우리가 러시아도 물리쳐주고, 지금 대한제국이 독립하여 존재할 수 있는게 모두 일본제국 덕분임을 모르시는겝니까?"

 

 

고종 황제 : "너네가 전쟁한건 너네 욕심 때문이지, 그게 어찌 우리를 위함이냐!"

 

 

이토 히로부미 : "승낙하든 말든, 일본은 이미 결심한 바가 있으니 아주 신중히 생각하셔야 할겝니다. 아주 곤란한 지경에 빠지고 싶진 않으시겠지요?"

 

 

고종 황제 : "일왕한테 가서 전해라! 대한제국은 독립국의 지위를 유지하겠다고!"

 

 

이토 히로부미 : "자꾸 이러면 재미 없습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는게 좋을텐데요...ㅋㅋ"

 

 

고종 황제 : "그대는 일단 물러가라. 대신들과 의논해서 결정할 일이다!"

 

 

# 1905년 11월 15일

(일본 공사 하야시, 일본군 총사령관 하세가와는 궁궐 주변에 보병, 포병, 기병을 배치한다)

 

 

이토 히로부미 : "이제 그만 고민 하시고, 지금 드리는 이 협약안에 서약을 하시지요"

 

#을사조약 협약안

1. 일본국 정부는 재동경 외무성을 경유하여 한국의 외국에 대한 관계 및 사무를 감리, 지휘하며, 일본국의 외교대표자 및 영사가 외국에 재류하는 한국인과 이익을 보호한다. 

2. 일본국 정부는 한국과 타국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의 실행을 완수하고 한국정부는 일본국정부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 국제적 성질을 가진 조약을 절대로 맺을 수 없다. 

3. 일본국정부는 한국 황제의 궐하에 1명의 통감을 두어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고 한국 황제를 친히 만날 권리를 갖고, 일본국정부는 한국의 각 개항장과 필요한 지역에 이사관을 둘 권리를 갖고, 이사관은 통감의 지휘하에 종래 재한국 일본영사에게 속하던 일체의 직권을 집행하고 협약의 실행에 필요한 일체의 사무를 맡는다. 

4. 일본국과 한국 사이의 조약 및 약속은 본 협약에 저촉되지 않는 한 그 효력이 계속된다. 

5. 일본국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의 유지를 보증한다'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 한마디로,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고, 보호국으로 삼겠다는 내용-

 

고종 황제 : "그대는 어찌 일국의 황제인 나에게 이런 치욕적인 처사를 행하는가! 나는 결코 서약할 수 없다!!!"

 

 

이토 히로부미 : "거참 말 안 통하네!!! 지금 밖에 일본 군대가 둘러싸고 있는거 안보이심? 힘쓰기 전에 쫌 하라고!!!"

 

 

고종 황제 : "안해! 안해! 절대 안해! 난 못해!"

 

 

 

# 1905년 11월 17일

(고종 황제는 결정하지 않겠다며 입을 다물어버리고, 결정권은 결국 8명의 대신들에게 위임된다.)

 

(그러나 대신들의 장시간의 회의에도 결코 결정이 나지 않았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군 총사령관 하세가와, 헌병대장 및 헌병들을 이끌고 회의실로 난입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다.)

 

 

이토 히로부미 : "이 답답한 조센징들... 한명씩 조져야지 안 되겠다!"

 

 

이토 히로부미 : "일단 한규설 당신부터, OK야 NO야? 빨랑 말해! 내눈 똑바로 보고 말해라! 앙!!"

 

 

한규설(참정대신) :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인고! 일본 놈들이 왜 대한제국의 거사에 이래라 저래라 하냔 말이다!!!"

 

 

이토 히로부미 : "저 새끼 당장 끌고가! 더 시끄럽게 하면 그냥 죽여버려!"

 

 

한규설(참정대신) : "내 의견은 절대 NO다!! 절대로 우리 대한제국을 넘길 수 없다!!!"

*한규설은 이후에도 죽을 때까지 일제가 수여하는 작위를 거부한 인물로 알려짐" 

 

 

민영기(탁지부대신) : "나도 절대 불가!! 이런 말도 안되는 협약엔 절대 찬성할 수 없다!"

*민영기는 이후 일제로부터 남작작위를 받고, 적극적으로 친일 행위를 한 것으로 알려짐

 

 

이하영(법부대신) : "이런 야만적인 협약이 어디있는가! 절대로 안된다!"

*이하영은 이후 일제로부터 자작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고문까지 한 것으로 알려짐. 우리나라 최초로 고무신을 제조한 인물이기도 함

 

 

이토 히로부미 : "너네 그러다 진짜 죽는다... 나머지 5명... 너네 똑바로 대답해라..."

 

(그러나...이토 히로부미와 하야시는 이미 이완용을 비롯한 5명의 을사오적 들을 사전 섭외해둔 상태였다...)

 

 

이완용(학부대신) : "적극 찬성합니다!!! 일본 천황 폐하의 보살핌이 없이 조선은 미래가 없습니다!"

*친일파의 대표 이사. 회장님 급. 고종에게 퇴위를 강요하고, 1910년 한일병합(경술국치)까지 체결하신 제대로 친일에 집중하신 양반으로 알려져있음

 

 

이근택(군부대신) : "완전 좋아요!!! 일본인이 되고 싶었스므니다!"

*이근택은 일제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고문이 되어 아주 호화로운 생활을 누린 것으로 알려짐

 

 

이지용(내부대신) : "조선은 미래가 없지요. 찬성합니다"

*이지용은 고종황제의 5촌조카였다. 일제로부터 백작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고문까지 했으며, 일제강점기 시절 가장 부유했던 사람으로 알려짐

 

 

권중현(농상공부대신) : "일본의 신문물을 받아들여 발전해야겠지요... 찬성합니다"

*권중현은 일제로부터 자작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고문까지 한 것으로 알려짐

 

 

박제순(외부대신) : "당연히 찬성하지요! 제가 대표로 직접 협약을 체결하겠습니다!"

*박제순은 을사조약을 대표로 체결한 인물로, 일제로부터 자작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고문을 하며 부유하게 살았던 것으로 알려짐

 

 

(이렇게 을사조약이 체결에 찬성했던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권중현, 박제순 '을사오적' 이라고 부른다)

 

 

이토 히로부미 : "그럼 5대3으로 이 협약은 체결하는걸로 한다! 찍소리만 해봐 아주 그냥 확!"

 

 

 

(이렇게...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는 을사늑약이 체결된다)

  

(을사조약 체결 원본)

 

 

 

 

이토 히로부미 : "조약이 체결되었으니 외국 대사들은 모두 떠나라! 이제 조선은 일본이 관리한다!"

 

 

(대한제국에 주재하던 모든 외국의 공사(대사관)은 대한제국에서 철수하게 된다.)

 

 

(대신 일제는 '통감부'를 세워 이토히로부미를 초대 통감으로 대한제국의 모든 부분을 제약해 들어오기 시작한다)

 

 

# 1905년 11월 30일

(전국적으로 을사늑약의 체결을 반대하는 상소가 올라오기 시작하며, 특히 민영환은 강렬하게 저항한다.)

 

 

민영환 : "아니 이런 말도 안되는 조약이 어디 있는가!!! 폐하 이것은 조약도 아니옵니다!  "

 

 

(민영환은 조병세와 함께 신하들을 모아 대궐로 나가 을사늑약 반대 상소를 올리지만, 조병세가 체포되어 버린다.)

 

 

 

(민영환은 굴하지 않고, 스스로 앞장서 상소하려고 나아감)

 

 

 

일본군 : "야 저새끼 체포해! 퍽퍽"

 

 

 

(민영환도 일본 헌병대에 체포당하고, 견책까지 당하게 된다)

 

 

민영환 : "일제를 몰아내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죽음으로써 만천하에 부당함을 알리는 것 뿐이다... "

 

 

 

(민영환은 자신의 명함 뒤에 유서를 작성하여 백성, 고종황제, 그리고 외국 외교 사절들에게 보낸다)

    

(민영환의 명함에 적힌 유서)

 

 

민영환 : "내가 죽음으로써 나라를 빼았김을 막지 못한 것에 대해 이천만 백성들께 사죄드리며..."

 

 

민영환 : "죽어서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구천을 맴돌겠으니..."

 

 

민영환 : "우리 동포들께서는 부디 힘을 모아 우리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하는데 힘 써주시기 바랍니다"

 

 

민영환 : "그렇게만 된다면... 이 민영환은 죽어서도 기쁘게 웃을 수 있을 것입니다."

 

 

# 유서 전문

〈마지막으로 우리 대한제국 이천만 동포에게 고함〉 

오호라, 나라의 수치와 백성의 욕됨이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우리 인민은 장차 생존 경쟁 가운데에서 모두 진멸당하려 하는도다. 

대저 살기를 바라는 자는 반드시 죽고 죽기를 각오하는 자는 삶을 얻을 것이니, 여러분이 어찌 헤아리지 못하겠는가? 

영환은 다만 한 번 죽음으로써 우러러 임금님의 은혜에 보답하고, 우리 이천만 동포 형제에게 사죄하노라. 

영환은 죽되 죽지 아니하고, 구천에서도 여러분을 기필코 돕기를 기약하니, 바라건대 우리 동포 형제들은 억천만배 더욱 기운내어 힘씀으로써 뜻과 기개를 굳건히 하여 그 학문에 힘쓰고, 마음으로 단결하고 힘을 합쳐서 우리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한다면, 죽은 자는 마땅히 저 어둡고 어둑한 죽음의 늪에서나마 기뻐 웃으리로다. 

오호라, 조금도 실망하지 말라.

 

 

(유서를 남긴 민영환은 이완식의 자택에서 스스로 목을 그어 자살한다... 이 때 민영환의 나이 45세...)

  

  

(서울 종로구 공평동, 민영환 선생 자결터 - 출처 한국관광공사)

 

 

 

(그의 충정에 감화된 조병세를 비롯한 여러 대신들이 함께 자결하며, 이는 백성들의 공감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고종 황제 : "아아 대한제국을 위해 그토록 힘써주던 민영환이...가다니... 그를 정1품 의정대신으로 추증하고, '충정공'의 시호를 내려라"

 

 

고종 황제 : "그리고 내 친서를 갖고 외국에 나가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알리라"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하는 등 무효 선언을 위해 노력한다.)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외국에 알리기 위한 고종의 친서)

 

 

(그러나 이미 정세가 기울어... 외국에서는 고종의 친서를 무시한다...)

 

 

 

(그리고 민영환이 죽고 1년 뒤...)

 

 

 

- 민영환의 자결 당시, 그의 피가 묻은 옷과 칼을 두었던 자리에서 대나무 한그루가 자라난다-

 

  

(출처 : 고려대 박물관, 문화컨텐츠 닷컴)

 

 

-이를 혈죽(血竹) 혹은 절죽(節竹)이라고 하며, 대나무 잎의 개수가 정확히 민영환이 죽을 당시 나이였던 45개였다고 한다-

 

 

(일제가 이 대나무를 뽑아버렸으나, 민영환의 부인이 이를 수습하여, 후손들에 의해 지금까지 전해진다)

   

(출처 : 고려대 박물관)

 

그리고 해방 후,

 

1946년 10월 1일, 조선 말의 순국지사 '충정공 민영환'의 시호를 따 지금의 '충정로'라는 이름이 지어집니다.

 

충정로역 또한 '충정공 민영환' 선생을 기리기 위해 지은 이름입니다.

 

 

1957년에는 민영환 선생을 기리기 위한 동상도 세워집니다.
(안국동 로터리에 있었으나, 2003년 조계사 앞 우정총국공원으로 옮겨집니다. 관리가 잘 안 되고 있다고합니다...ㅠㅠ)

   

(민영환 선생 동상)

 

 

1962년에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받게 되며

 

용인 마북동에 위치한 민영환 선생의 묘비는 이승만 전대통령의 친필로 작성되어 있습니다.

 

 

(용인 마북동, 민영환 선생 묘)

 

 

위에 스토리는 실제로 저런 대사를 쳤다는 것은 아닙니다만...

제가 공부한 바에 따르면 분명 저러한 맥락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아무래도 근현대사인지라,

민영환 선생에 대한 평가는 여러가지가 존재합니다...

 

하지만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바친 민영환 선생의 뜻 만큼은 왜곡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앞으로 충정로를 지나실 때면, 민영환 선생을 한 번 떠올려 보시는건 어떨가요?

 

감사합니다.

 

 

# 참고 - 대한제국 애국가

 

민영환 선생은 대한제국의 애국가를 작사하기도 했는데요.

(프란트 에케르트 곡에 작사를 붙여 불려진 것으로 알려짐)

 

 

 

하지만, 1907년 순종황제 즉위식 때 공식적으로 연주된 것을 마지막으로...

1909년에는 일제에 의해 금지곡으로 지정됩니다.

 

이에 따라 가사가 공식적으로 쓰여지지 못해,

해외 동포들에 의해 구전으로만 전해져오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몇 가지 버전의 가사를 소개해 드리면 아래와 같습니다.

 

유투브 음원의 가사

상뎨여 우리나라를 도으쇼셔 

반만년의 역사 배달민족 영원히 번영하야 

해달이 무궁하도록 셩디동방의 원류가 

곤곤히 상뎨여 우리 나라를 도으쇼셔.

 

 

하와이 악보 버전(1925년 악보를 만들면서 옮겨 적은 버전)

상뎨(上帝)는 우리 나라를 도으쇼셔 

영원무궁토록 나라태평ᄒᆞ고 인민(人民)은 안락ᄒᆞ야 

위권(威權)이 셰샹에 떨치여 

독립자유부강을 일신(一信)케ᄒᆞ소서 

상뎨(上帝)는 우리 나라를 도으쇼셔

 

하와이 악보 버전 해석

하느님은 우리나라를 도우소서 

영원 무궁토록 나라 태평하고 인민은 안락하여 

위엄과 권세가 세상에 떨치여 

독립 자유 부강을 일신케 하소서 

하느님은 우리 나라를 도우소서


전국 지하철 역명 유래 지도는 아래 사이트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dogumaster.com/map/subway

전국 지하철 역명 유래 지도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