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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언어, 문화(History, Language, culture)/문화재 지도(국보, 보물, 사적, 명승, 천연기념물)

[문화재 여행] 국보 3호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역사 및 유래

by 카레유 2021. 3. 16.

대한민국의 문화재를 알기 쉽게 정리한 글입니다.

전국 문화유산(국보, 보물, 사적 등) 리스트 지도는 아래 사이트를 참고해주세요.

http://dogumaster.com/map/heritage


국보 제3호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서울 北漢山 新羅 眞興王 巡狩碑)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자리(북한산 비봉, 출처: 문화재청)

 

북한산 비봉에 있던 신라 진흥왕 순수비는

1816년(순조16) 추사 김정희가 발견하여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보호를 위해 경복궁으로 옮겨졌다가,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역사 및 유래>

540년,

신라 제 24대 왕으로 즉위한 진흥왕

신라의 역대 왕들 중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한 왕입니다.

 

551년,

지금의 충주, 단양 지역을 시작으로

한강은 물론 함경남도 지역까지 영토를 넓혔으며,

 

556년,

북한산을 순시(순수)하러 간 길에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를 세운 것으로 추정됩니다.

(학자에 따라 568년 이후에 세운것으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이 외에도 영토 확장을 기념하기 위해 

지방 곳곳을 순시(순수) 순수비를 세웠는데

현재까지 알려진 것은 창녕비(昌寧碑), 북한산비(北漢山碑), 황초령비(黃草嶺碑), 마운령비(摩雲嶺碑) 등 4개가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무학대사의 비로 알려져 있었으나,

 

1816년(순조16),

추사 김정희가 북한산 순수비를 발견하고 판독하여,

신라 진흥왕이 세운 순수비임이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북한산 진흥황 순수비 측면 비문(출처: 문화재청)

김정희는 비의 측면에 자신이 판독했다는 사실을 새겨두었습니다.

 

此新羅眞興大王巡狩之碑 丙子七月 金正喜 金敬淵來讀

이것은 신라 진흥대왕의 순수비. 병자년(1816) 7월 김정희 김경연 와서 읽음

 

丁丑六月八日 金正喜 趙寅永同來 審定殘字六十八字

정축년(1817) 6월 8일 김정희 조인영 함께 와서 남은 68글자 해독

 

 

이에 대해 김정희가 직접 쓴 글을 참고해보시지요.

 


진흥왕의 두 비석에 대하여 상고하다

 

이 비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어 

요승 무학이 잘못 찾아 여기에 이르렀다는 비[妖僧無學枉尋到此之碑]라고 잘못 칭해 왔다. 

 

그런데 가경(嘉慶) 병자년(1816년, 순조 16) 가을

내가 김경연(金敬淵)과 함께 승가사(僧伽寺)에서 노닐다가 이 비를 보게 되었다.

 

비면(碑面)에는 이끼가 두껍게 끼어 마치 글자가 없는 것 같았는데, 

손으로 문지르자 자형(字形)이 있는 듯하여 본디 절로 이지러진 흔적만은 아니었다. 

 

또 그때 해가 이끼 낀 비면에 닿았으므로 비추어 보니, 

이끼가 글자 획을 따라 들어가 파임 획[波]을 끊어 버리고 삐침 획[撇]을 마멸시켰는지라, 

어렴풋이 이를 찾아서 시험 삼아 종이를 대고 탁본을 해 내었다. 

 

탁본을 한 결과 비신은 황초령비와 서로 흡사하였고, 

제1행 진흥(眞興)의 진(眞) 자는 약간 마멸되었으나 여러 차례 탁본을 해서 보니, 진(眞) 자임에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마침내 이를 진흥왕의 고비(古碑)로 단정하고 보니, 

1200년이 지난 고적(古蹟)이 일조에 크게 밝혀져서 무학비(無學碑)라고 하는 황당무계한 설이 변파(辨破)되었다.

 

금석학(金石學)이 세상에 도움이 되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우리들이 밝혀 낸 일개 금석의 인연으로 그칠 일이겠는가. 

 

그 다음 해인 정축년(1817년, 순조 17) 여름에 또 조인영(趙寅永)과 함께 올라가 

68자를 살펴 정하여 돌아왔고, 그 후에 또 두 자를 더 얻어 도합 70자가 되었다. 

 

비의 좌측에 새기기를 

이는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인데 병자년 7월에 김정희와 김경연이 와서 읽었다[此新羅眞興王巡狩之碑 丙子七月金正喜金敬淵來讀]” 

하고, 

 

또 예자(隷字)로 새기기를 

“정축년 6월 8일에 김정희와 조인영이 와서 남은 글자 68자를 살펴 정했다[丁丑六月八日 金正喜趙寅永來審定殘字六十八字]” 

하였다.

 

『완당집(阮堂集)』에 수록된 「진흥이비고 (眞興二碑考)」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이때 김정희가 탁본을 해두어서,

세월이 흐른 지금도 순수비의 비문을 어느정도 읽을 수 있습니다.

 

 

<순수비 내용>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탁본(출처: 문화재청)

훼손이 심하여 판독할 수 없는 글자가 많지만,

현재까지 판독 가능한 글자로 짐작해보면, 아래와 같은 내용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1. 진흥왕이 사방으로 영토를 개척했다는 내용

2. 북한산을 순행하고, 백성들을 위로 했다는 내용

3. 진흥왕을 수행한 신료들의 명단 및 순수비 건립 배경 등에 대한 내용

 

 

<순수비의 상태>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출처: 문화재청)

높이 1.54m, 너비 0.69m, 두께 0.16m인 북한산 순수비는

세월의 흐름에 따른 마모가 심하고, 많은 부분이 절단, 손상되어 있습니다.

 

또한 비의 뒷면에는 6.25 전쟁 당시의 총탄 흔적들이 무수히 남아있습니다.

진흥왕 순수비 후면(출처: 국립중앙박물관)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총탄흔적(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이에 따라 보호를 위해 경복궁으로 옮겼다가,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여 보관하고 있습니다.

 

1962년 12월 20일 대한민국 국보 3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이 것으로 대한민국 국보 제 3호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대한 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문화재 지도>

전국의 국보, 보물, 사적, 명승, 천연기념물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전국 문화재 지도는 아래 사이트를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http://dogumaster.com/map/herit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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